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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명함

[주]지티엘커뮤니케이션/- 즉석명함

by 디자이너-이충길 2014. 8. 1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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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에 대하여.
이집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피라미드를 보고 놀라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된 쿠프의 대 피라미드에 케프렌,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가 합쳐진 위용은 고대인들은 물론 현대인들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라미드를 본 관광객들은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멜 신전의 정면은 파라오의 모습을 한 4개의 거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상은 높이가 20미터,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미터, 입술의 폭이 1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기 때문이다. 정면 조각 뒤로 돌산을 파서 만든 신전은 매년 춘분과 추분에 아침의 햇빛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양신과 파라오의 조상을 환하게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신전을 건설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인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이집트의 최절정기로 일명 ‘제국 시대’라고 불린다.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 및 오리엔트 지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던 이집트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히타이트가 양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이집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강력한 히타이트. 두 제국 사이에 거대한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카데시 전투이다.




히타이트



19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국가였다. 히타이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8년에서 1892년에 걸쳐서 독일의 고고학자 루우샨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터어키의 동남단 진지르리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발굴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핫투사스라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다. 핫투사스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이 해독되고서야 비로소 히타이트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현 터키 지역을 통일한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의 수도를 키질강 만곡부의 중심 지점으로 옮기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핫투사스(Hattusas)라고 명명(命名)했다.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을 핫티 왕국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핫티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지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부른다.




히타이트는 점차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530년경에는 무르실리시 1세가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여 함무라비 왕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 통치를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왕은 암살된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침체해 있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동안 인접 지역의 강국 미탄니와 격렬한 전투를 계속한다. 히타이트의 동쪽에 위치한 미탄니가 가장 번성할 때는 미탄니 군이 히타이트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입하여 간신히 수도 주변만 부지할 때도 있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슛필룰리우마시 1세로 그는 수도에 거대한 성을 쌓아 본거지를 튼튼히 하고 후방 지역의 여러 소국과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배제한 다음 미탄니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주효하여 미탄니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그곳에 친(親) 히타이트 정권을 수립하여 동부의 방위를 철저히 하였다.




이때 히타이트와 맞설 수 있는 국가는 남부의 이집트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세력권은 가나안까지 미치고 있었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정복하자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국경에 접하게 되었고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그를 추후에 이름이 붙는 ‘건축의 대왕’으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국경과 마주치고 강력한 제국 히타이트와 전쟁의 대 서사시이자 기록으로 남겨진 전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재위 5년 여름에 피람세스(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카데시 전투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 대국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만 5천 명이나 동원했다.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천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람세스 2세오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 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있었다.




이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아주 멀리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매우 뒤 처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로 보아 적은 매우 멀리 있었으므로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두인은 무왓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람세스 2세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後發)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레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왓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독려했다.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 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무왓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쫓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만 8천 명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무왓탈리시의 이 이상한 조치를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나는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즉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 데다가 이집트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왓탈리시는 양국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이집트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현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까지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시리아가 공격해 오면 전선이 길어져 양 지역을 방어하기에 힘들므로 차라리 이집트와 협정을 맺어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가 있다. 우선 람세스 2세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 즉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멜,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과 누비아에 있는 두 개의 성소, 즉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는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으로 활기가 넘치는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화(戰爭畵)와 비교해 볼 때 혁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의 부조 벽화는 전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고,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 장군의 기록과 같다.




전투의 전말



카데시 전투는 양쪽 군대의 전략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전투였다. 전투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 이 군사보고서는 전투에 직접 참전한 병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도 최초이다.꼼꼼하게 기록된 날짜들을 계산해 보면, 이집트 원정군이 카데시 근처에 도달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람세스 2세는 피람세스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여러 곳에 전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히타이트 군에 언제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카세시 전투에서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기록이 역사적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쟁이지만 전쟁의 결과는 그가 설명한 것과는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람세스 2세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실 유사 이래 한 쪽이 철저히 패배하여 완전히 그 민족이나 국가가 소멸되기 이전에는 전쟁의 결과는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전투 기록의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카데시 전투만은 승리자라고 적은 이집트의 기록만이 아니라 패배자라고 적힌 히타이트 측의 기록도 있으므로 전쟁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학자들은 양측의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결과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 2세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완패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시리아의 중부와 북부를 히타이트가 지배했기 때문이다.이집트가 승리했다면 당시 역사상 최대의 전투 현장을 히타이트에게 내어주었을 리가 없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이집트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간 전리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전리품도 주로 적의 시체에서 걷어낸 무기와 말 따위가 전부로, 이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람세스 2세가 곧바로 후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투 장비를 보아도 보면 히타이트가 이집트보다 월등하였다. 히타이트는 당시 철로 된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는 이와 반대로 청동제의 무기를 사용했다. 히타이트의 하튜샤 제철소에서는 상질(上質)의 철제 무기, 갑옷, 철제 기구 등을 생산했다. 철제 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가진 이집트군을 괴롭혔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특히 히타이트의 가장 큰 무기는 전차(戰車)는 일반적으로 마부 1명, 사수 1명, 전투병 1명이 타고 전광석화와 같이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집트군은 한 전차에 두 사람씩 탔다. 대부분이 장교인 전차 주인 한 사람과 마부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 히타이트는 3만 여명의 상시군(常時軍)이 있었다.




이와 같이 카데시 전투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기록에 걸 맞는 히타이트의 기록 역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발견된 것은 고고학 사상 가장 믿기 어려운 우연과 행운 때문이었다.




최초의 국제 조약

1906년에 베르린 대학과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 공동 발굴팀은 터키의 보가즈코이(Bogazk?y)에서 히타이트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발굴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이 판은 기원전 1270년,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핫투시리 3세(Hattushili Ⅲ)가 맺은 평화협정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협정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천 년 이상이나 경과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협정이 맺어지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놀랍게도 이 협정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협정의 이름은 ‘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핫투시리 사이에, 좋은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핫투시리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힛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으로 히타이트의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

전투 이후

람세스 2세는 제위에 오른 지 몇 년이 안되어 카데시 전투라는 거대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 후에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무려 67년이나 되었지만 국내외로 아무런 문제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안정된 통치 기간을 이용하여 대규모 건물들을 건설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부심멜 신전이다.


1959년에 이집트에서 아스완댐을 건설하자 아부심멜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유네스코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의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동참을 요청하였고 50여 국가들이 참여하는 구난 작업이 펼쳐졌다.

계획은 단순하여 아스완댐이 건설되더라도 수몰되지 않도록 위쪽으로 65미터를 옮기는 것이었다. 람세스 2세의 좌상과 강 양쪽에 위치한 2개의 사원을 고지대로 옮기기 위해 석조물을 1천 개 이상으로 절단한 후 이를 운반하여 원형대로 복원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유적을 이전시킬 대상 지역도 원래 유적이 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이 사업은 인류 문화재를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지킨 좋은 예로서, 현재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적으로 보호해야 할 문화 유산을 지정하여 관리 및 후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람세스 2세가 67년이라는 장기 집권을 하고 무려 110명이나 되는 자손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4명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도 화제 거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친 결혼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파라오는 인간이자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평민과는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파라오와 가장 가까운 근친과 결혼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상 람세스 2세는 역사상 가장 먼저 전투의 승패에 대해 거짓말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 중에서 람세스 2세를 비난하는 사람이 비교적 많은 것은 그가 전쟁의 승패를 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며 또 신이 사는 세계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국가나 위정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조작하는 데 서슴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조작하거나 가필을 하지 않고 모두 지웠다. 그들은 수많은 신전에 새겨진 이름이나 그림의 경우 얼굴을 지우거나 이름을 삭제했는데, 현재 이집트의 유적에서 이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람세스 2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건축물을 새로 지으면서 자신의 선조가 건설한 건축물의 재료를 다반사로 빼냈다. 그것은 자신의 건축물을 보다 쉽게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영국인 고고학자 퀴벨은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아누비스의 지성소에서 빼내 온 기초 벽돌 층을 발견하여 하셉수트가 재료를 도둑맞은 지 3,000년 후에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람세스 2세가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에서 선조의 이름을 지우고 마치 자신이 건설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소위 역사를 가필하여 조작한 것이다.

고대이집트 문명에 관하여/

개요

BC 3200년경부터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통일할 때까지 약 3,000년간 오리엔트 지방에 번영했던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선사 시대

이집트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금석병용시대를 경유하여 역사시대(왕조시대) 로 이행된 것은 확실

하다. 이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플라이스토세(世)는 자연경 관(自然景觀)도 왕조시대와는 차이가 있었

다. 유럽 빙하기(氷河期)의 영향으로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교대로 왔으나 그 무렵의 인류가 거주

할 수 있는 지역 은 현재의 하곡지대가 아니라 주로 서방의 대지(臺地)였다.

아슈르기(期) ·무스티에기 ·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나일강 에 형성된 단구(段

丘) 위나 파이윰호(湖),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 주변의 높은 지 점에서 발견된다.

중기까지의 문화가 이집트 전토(全土)에 걸쳐 동일한 데 대하 여 후기에 이르러서는 파이윰 지방에 에피

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 테리안 문화 등의 지방색이 나타났다.

이 시대의 북아프리카는 다우습윤(多雨濕 潤)에서 건조(乾燥)로의 이행기(移行期)에 해당한다.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접어들 무렵에는 건조화가 진전되 어 나일강의 수위(水位)

도 내려가고 자연환경도 현재와 비슷하게 되었다.

사람들 은 차차 나일하곡에 모여 정주하였으며, 농경 ·목축을 영위하면서 왕조시대로 이 어지는 사람들

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대체로 BC 5000년경의 일이다.

이 시대의 유적은 카이로 서남 80 km에 있는 파이윰(A) 문화, 중부 이집트 동안 (東岸)의 델 타사 문화

가 알려져 있는데 반정주(半定住)의 상태이며, 농경과 수 렵이 반반이었다. 토기 ·석기 ·골각아기(骨角

牙器) ·바구니세공[籠細工] ·직물 · 피혁제품 ·팔레트(화장접시) ·꾸미개[裝身具] 등을 가지며, 이

미 상 ·하 이집트에 서 각각 그 특징이 나타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속한다. 이에 뒤따르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는, 상(上)이집트에

서는 바다리 문화, 하(下)이집트에서는 메림데 문화가 알려져 있다.

바다리에서는 고타(敲打)에 의한 것이고, 주조법(鑄造法)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초의 구리제품이 발

견 되었으며, 토기가 현저히 발달했다. 경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시나 이 ·누비아산(産)

의 공작석(孔雀石)이나 홍해산(紅海産)의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 재(杉木材) 등이 수입되었다.


선왕조

이집트의 선왕조시대(BC 3600?∼BC 3100?)는 국가의 형성에 직접 연결되는 중 요한 시대이며, 암라(나카

다 Ⅰ)문화 ·마아디(Maadi)문화 ·게르제(나카다 Ⅱ)문화 등이 있다.

인공관개(灌漑)가 도입되고, 인구는 증가하고, 촌락은 도시 규모로 되 었다. 왕조시대의 노모스[州]의 기

초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외국과의 교 역도 더욱 왕성해졌는데, 특히 아시아산(産) 은 ·연(鉛) ·자수정 ·흑요석(黑曜石) · 청

금석(靑金石)이나 메소포타미아산 원통인장(圓筒印章) 등이 수입되었다.

토기나 호부(護符)에 토템을 나타내는 동물이 그려져 있는데, 후세의 하트호르와 닮은 우두(牛頭)의 여성

도 보인다. 무덤에는 우샤브티를 연상시키는 인형이 부장 되었으며, 후장(厚葬)의 풍습이 엿보인다.

게르제기(期)에는 노동의 분화와 신분 의 차가 보이며, 파상 파수토기(波狀把手土器) ·유문토기(有文土

器), 프린트제 (製)의 정교한 손칼(刀子)이 한창 만들어졌다. 게르제기의 히에라콘폴리스의 무덤 에는 석

회칠이 되어 있고, 그 위에 갖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왕조시대에 성행한 벽화의 조형(祖型)을 이룬

다.


초기 왕조

이집트의 초기 왕조시대는 제1~제2왕조(BC 3100?∼BC 2686?)시대를 말한다.

국토의 통일과 건설의 시대인 게르제기(期)의 말에 상 ·하 이집트의 각 노모스는 차차 통합되었고 곧이

어 남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개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쌍방이 함께 왕가와 같은 종족의 귀족에 의하여 지배되었는데 처음에 하이집트는 부토, 상이집트는 히에

라콘폴리스를 수도로 하였다.

그 뒤 북은 사이스, 남은 티 니스(티스)로 옮겼다. 한때 북왕국이 남왕국을 지배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남왕국이 전국토를 지배하 였다.

이 통일에는 스코르피온, 나르미아 두 왕이 활약하였는데 그 기록은 히에라 콘폴리스에서 발견된 석회암

제(石灰岩製)의 곤봉두(棍棒頭)와 봉납용(奉納用)의 팔레트에서 볼 수 있다.

BC 280년경 이집트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상 ·하 이집트 를 처음으로 통일하였고, 새로이 멤피스를 축

조한 제1왕조 초대의 왕은 메네스였 다고 하나, 그것은 나르미아와 동일인물인 것 같다. 이 통일은 BC

3100년경에 이 루어졌다고 짐작된다. 마네토에 의하면 제1왕조는 8명의 왕, 제2왕조는 9명의 왕이 즉위하

였다.

그러나 400년에 걸친 초기 왕조시대에 관하여는 채광(採鑛)을 위한 시나이 원정과 누비 아 토벌 이외에

는 거의 분명하지 않다. 국왕과 그 가족은 아비도스와 사카라에 매 장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출토품이 당

시 문화의 한 면을 나타낸다. 왕묘는 마스타 바의 형태를 취하였다.

‘신(神)이 되는 왕’에 의한 통치사상이 널리 퍼졌으며, 국가 의 조직이나 토목 ·건축의 기술도 크게

진보하였다. 문자도 이 시대에 크게 발전하 였으며, 석제용기 ·동제품(銅製品) ·귀금속 ·보석 가공 등

의 공예도 높은 수준에 이 르렀다.


고왕국

이집트의 고왕국시대는 제3~제6왕조(BC 2686?∼BC 2181?)시대를 말한다. 이집 트 최초의 융성기로서 각

방면으로 이집트 문명이 가진 여러 특징이 나타난 시대 이다.

이 시대에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특징있는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대로 피라 미드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

는 멤피스로 옮겨졌다. 제3왕조의 조세르왕은 카이로의 남서쪽 30 km 사카라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혔다.

이것은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으로서 처음으로 돌을 사용하였고, 외 관(外觀)은 마스타바를 6단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과도적 (過渡的)인 것으로서 높이 62 m, 북쪽의 장제전(葬祭殿)

을 비롯하여 부근에는 의 식용 건물과 열주랑(列柱廊) ·광장 등이 있으며, 이것을 높이 약 10 m, 전장

(全長) 1,600여 m의 주벽(周壁)이 남북으로 직사각형으로 둘러싼 피라미드 복합체를 구 성한다.

제4왕조의 왕 스네프루는 3개의 피라미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다슈르의 북쪽 피 라미드는 저변 213 m,

높이 97.5 m의 각추형(角錐形)으로 된 최고(最古)의 피라미 드이다. 기제에는 3개의 큰 피라미드가 솟아

있다. 모두 제4왕조의 것으로, 북쪽에 서부터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의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저 변 230 m, 높이 146.5 m이고 2.5 t의 큰 돌을 230만 개 쌓아올린

것이다. 북쪽으로 난 입구에서는 길고 복잡한 통랑(通廊)을 통하여 매장실에 이르는데 도굴(盜掘) 을 방

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에는 장제전 이외에 하곡(河谷)신전과 그곳으로 통하는 참배길이 부수되어 있다. 또

한 유명한 스핑크스는 국왕의 얼굴형을 닮았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제5∼제6왕조에서도 계속 축조되었

다. 그러나 규모는 작아졌으며, 그 에 대신하여 태양신 라를 제사하는 대규모 신전이 건설되었다.

제5왕조 최후의 왕 우나스의 피라미드 내부에는 최초로 피라미드 텍스트(매장용의 呪文)가 새겨져 있다.

각 왕의 업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시나이 반도의 구리 광산이나 누비아 지방의 채석장을 확보하고 때

에 따라서는 양재(良材)를 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또한 향료 를 구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제5왕조에는 영토가 제2폭포 와디할파까 지 넓혀졌다. 그러나 제6왕조에 접어들자 왕권은 약체화되고 각

노모스의 지사 (知事)가 그 직위를 세습하게 됨으로써 왕명은 힘을 잃고 노모스는 반독립국과 같 이 되었

다. 고왕국시대에 국왕은 파라오라 불리고 절대적 전제군주로서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재판관 ·군인 ·신

관 등의 모든 면에서 최고위의 존재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였다.

왕은 왕족 중에서 고급관리를 선임하여 중앙집권정치를 하였다. 소수의 도시 생활 자 이외의 국민의 대다

수는 농민이며 그 밖에 전쟁노예가 있었다.

당시의 생활은 분묘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浮彫)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는 사회생활뿐

만 아니라 국가의 행사나 예술에까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 다. 이집트의 종교는 원래 수목 ·암석 ·

동물 등 자연물이나 생물에게 초인간적인 힘을 인정하는 주물(呪物)숭배였다. 그것이 곧 초자연적인 신

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 (化身)하였다. 예를 들어 호루스 신은 매, 하트호르 신은 암소, 아누

비스 신은 늑대 였다. 원래 이것들은 각 부족의 토템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지방신으로서 받들어졌 고 성

수(聖獸)로서 신전에서 사육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후장(厚葬)되었다.

이러한 신 가운데에서 태양신 라는,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점차 깊은 신앙의 대상 이 되었다. 이집트인

은 태양의 운행이나 수목의 번식에서 생명의 불사(不死) ·부 활을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거나, 내세의 생활을 위하여 특히 왕이 나 귀족이 훌륭한 분묘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건축기술과 기하학이 진보하였고 , 또 농업과 관련하여 토지 측량과 점성술이 발달하였으

며, 달력이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텍스트는 종교적 주문(呪文)이나 신화의 단편(斷片)으로 되어 있어,

이 시대의 신앙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제 1,2 중간기

제7~제10왕조(BC 2181?∼BC 2050?) 제6왕조 말부터 왕권은 쇠미하였고, 노모스 의 지사는 세습화되어 봉

건군주와 같이 되었다.

한편 관료정치에 강한 반감을 품 어오던 민중이 봉기하여, 사회는 혼란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의 분열과

혼란에 편 승하여 사막으로부터는 이민족(異民族)이 침입하였다.

일시적으로 질서가 회복되 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았으며,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문학이 번성했던 것

밖 에는 일반적으로 학문 ·미술이 모두 쇠퇴한 불모의 시대였다.

제13~제17왕조(BC 1750?∼BC 1567?) BC 1750년경 제12왕조는 붕괴되고 이집 트는 또다시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많은 왕이 교대로 즉위하였고, 때로는 병립 하기도 하였다.

이 혼란을 틈타 아시아에서 힉소스인이 침입하여, 삼각주지대의 아바리스에 성채를 구축하고 약 100년 동

안 주로 하(下)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에 의한 지배이다. 힉소스의 침입은 당시의 서아시아에 일어난 민족

이동의 일환이었고 문화 정도는 이집트에 비해 훨씬 낮 았으나, 그들은 말과 전차를 도입하여, 그 이후

의 전술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BC 1600년경이 되자 테베를 중심으로 하여 제17왕조의 제왕(諸王)에 의

한 반항 이 기도되어 장기간의 항쟁 끝에 카흐모스왕의 아우 아모세가 아바리스를 함락하 고 결국 힉소스

를 아시아로 추방하였다. 그는 귀국 후, 아모세 1세로서 제18왕조 를 일으켰다


중왕국

이집트의 중왕국시대는 제11~제12왕조(BC 2050?∼BC 1750?)시대를 말한다. 제1중간기의 말, 북의 헤라클

레오폴리스에 웅거한 제10왕조에 대하여 테베에 웅 거하는 안테프의 제11왕조가 독립하여 서로 대립하였

다.

오랜 항쟁 후에 이집트 는 멘투호테프 2세 치하에서 다시 통일되었다. 이후 테베는 약 1,000년 동안 이

집 트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장기간 방치되었던 누비아에 원정하여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에 이 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시나이 반도와 푼트 지방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는 테 베의 서쪽 교외 델 엘 부하리의 벼랑에 붙은 새로운 양식의 장제전(葬祭殿)을 건 설하였다. 그

의 후계자들은 통일을 유지할 힘이 없어 국내는 한때 혼란하였으나 최후의 왕 때의 재상 아메넴헤트 1세

가 제12왕조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테베의 시신(市神)인 아몬신(神)이 유력해졌다.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 세소스트리스 1세는 제3폭포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금광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지

방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다.

노모스의 세력을 장악하고 참된 의미에서 국토통일을 완성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였

다 . 그는 북상하는 니그로를 토벌하여 누비아를 지배하였고 각처에 성채(城砦)를 설 치하고, 팔레스티나

에 원정하였다. 이 시대의 교역은 시리아 ·크레타에까지 미쳤 다. 다음의 아메넴헤트 3세는 국내의 정치

에만 힘썼는데, 특히 댐과 관개용수로를 만들었고, 파이윰 지방을 개척하여 경지의 증대에 성공하였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의 북동에 있는 리셰트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리셰트 ·하와라 등지에 피라미

드나 신전이 조영되었다.

이 시대는 민중이 귀족에 대신하 여 힘을 얻어 관리에 등용되었고 농노에서 자유민으로 되는 길도 열리

는 등 이집 트의 역사 가운데서 비교적 민중의 힘이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 앙상에도 나타나 사후의 세계는 왕이나 귀족들의 독점물이 아니고, 민중들도 미라 가

되어 공동묘지에 매장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

종교 ·문학면에서도 피라미드 텍스트에 대신하여 관(棺)의 주위에 표시된 코핀 텍 스트는 일반인을 위

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왕국시대는 일반 문학(산문)이 가 장 발달한 시대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最古)의 모험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 에의 이야기》는 이집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

며 그 밖에 푼트 교역을 취급한 《난파선 이야기》와 사회적 관심을 나타낸 《능변의 농부 이야기》 등

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반영하고 서사(書寫) 재료로서 파피루스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고 , 서체도 쓰

기 쉬운 행서체로 옮겨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밖에 파피루스는 《기하학서》(린도 파피루스) 《외과

서》(에드윈스미스 파피루스) 《치병(治病) 의 서》(에베루스 파피루스) 등 학술적인 것에까지 미치고 있

다.


신왕국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제18~제20왕조(BC 1567?∼BC 1085?)를 말한다. 이 시 대는 이집트 역사상 고왕국

·중왕국에 이어지는 세 번째의 융성기로, 영토도 아시 아까지 확대되어 제국시대라고도 불렸다.

제18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힉소스를 추 방한 후에도 계속하여 팔레스티나 방면으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은

곧이어 전리품 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서아시아 정세는 각 민족 이 분립

·항쟁하는 시대였다. 곧 이집트도 그와 같은 국제정세 속으로 말려들어갔 다.

한편 투트모세 1세는 제3폭포까지 파병하는 등 남방(南方) 경영도 게을리하지 않 았다. 하트솁수트 여왕

은 내정에 힘쓰고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푼트 지방에 배를 보내어 향료(香料) ·상아(象牙) ·목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테베 서쪽 교외의 델 엘 부하리에 거대한 장제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왕과 공동통치를 하였던 투 트모세 3세는 여왕의 사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카데시

의 왕이 지휘하는 동맹군과 메깃도에서 싸웠는데 그 승리가 이집트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왕의

출병은 20년간 전후 17회에 이르렀고 북은 유프라테스강(江) 연안에서 남은 제4폭포까지 지배하에 두게

되어 이집트의 영토 는 사상 최대가 되었다. 방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얻게 되었고 각지에서 물자

가 집결되었으며, 미탄니 ·아시리아 ·크레타 등이 조공하였다. 따라서 테베에는 웅 장한 신전 ·왕궁,

귀족의 저택 ·상점 등이 들어서 번화하였다.

귀족은 충실한 가신(家臣)으로서 왕을 받들었으며, 그들을 고급관리로 하는 관료 조직이 정비되었다. 투

트모세 3세는 이제까지 한 사람이었던 재상을 두 사람으로 하여 상 ·하 이집트의 내정에 전념시켰다. 원

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 여는 강력한 상비군(常備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직업

인이 출현하 였고 곧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용병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큰

문제로 되어, 이것은 국력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승리는 신의 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신

자신의 승리이며, 국가의 번영은 아 몬신의 번영이라고 생각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은 신에게 토지를 기증

하고 신전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따라서 신관단(神官團)은 관료 ·군인에 못지 않은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방대한 신전령(神殿

領)은 신관의 사복을 채웠고 곧이어 왕위 계승에도 간섭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사후 시리아에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를 토벌하였고 다음의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와 동맹하여 그 왕녀

를 왕비로 맞았다.

이 무렵부터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신장하였는데, 이집트도 그 동향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아

멘호테프 3세의 시대는 표면상으로 이집트가 가장 안정되 고 융성한 시대였다. 왕은 거의 외정(外征)을

하지 않고 다만 신전 등의 건축공사 에 부(富)와 힘을 쏟았다. 왕은 아시아제국과 서한 및 기증물을 교환

하여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여기에 일종의 국제주의시대가 도래하였다(아마르나시대). 아멘호테프 4세는

절대 세력을 갖게 된 테베의 아몬신관단에게 반발하여, 태양신 아톤을 시신(市神)으로 하는 신도(新都)

를 오늘날의 텔 엘 아마르나의 땅에 조영 하여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명명(命名)하고 스

스로도 이크나톤 이라고 개명하였다.

왕은 아톤찬가(讚歌)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아시아에서는 반란이 잇달

아 일어나고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되었다. 결국 왕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아 사후에 아몬신앙은 부활되

었으며 신도 (新都)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고정화된 종래의 전통이 타파되고 개 방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외국과의 문화교

류도 행하여져서, 사실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투탕카멘 왕묘의 출토품에서

엿볼 수 있 다. 투탕카멘 왕은 18세 때 죽고 군인출신의 호렘헤브가 왕위에 즉위하여, 제18왕 조는 끝났

다.

제19왕조의 초대는 호렘헤브가 선택한 군인 출신의 람세스 1세이고, 그의 아들 세 티 1세는 재차 아시아

에서의 이집트의 우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전형적인 파라오로 67년 동안의 오랜 치세에, 각지에 다수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북쪽 또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아시아 경영 때문에 신도 를 삼각주지대의 타니스에 건설하였

다. 건축 사업 중에는 테베의 서쪽 교외에 세 운 장제전 라메세움이나,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대소 2신전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하하는 히타이트를 카데시전투(BC 1286)에서 막아냈고, 곧이어 아시리 아의 세력

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투실리시 3세와의 사이에 우호조약을 맺었다. 왕은 그 후 아시아 진출을 단념하였

다.

다음의 메르엔프타흐왕 시대부터 아시아는 또다시 민족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 졌고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때 이미 히타이트는 멸망하여 없어졌고 이 무렵부터 삼각주지대는 자주 리비아인 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관단의 세력에 대 하여, 왕실의 세력은 쇠퇴하여 왕위는 신관(神官) 헤리호르에게 찬탈되

었다.

신왕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테베에 조영된 카르나크 ·룩소르 등의 많은 신전과 여러 왕의 장제

전, 그리고 테베 서쪽 교외의 벼랑을 뚫고 매장한 국왕과 귀족 ·고관의 연도분(羨道墳)이다. 이것은 모

두 엄청난 부와 권력, 그리고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한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벽면의 부조

(浮彫)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술상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그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 다. 문학

은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만 들어졌다. 농민의 생활을 묘

사한 《두 형제 이야기》, 교훈적인 작품 《정의와 허 위의 이야기》 등이 있고 이외에도 고관의 분묘에

남겨진 자전적(自傳的)인 묘비 명(墓碑銘) ·전승가, 아몬신 ·아톤신의 찬가, 격언(格言) ·연가(戀歌)

도 남아 있다. 또 《사자(死者)의 서》를 비롯한 종교적인 작품도 있다.



후기 왕조

이집트의 후기 왕조시대는 제21~제30왕조(BC 1085?∼BC 332)시대를 말한다.

테베에서 헤리호르가 왕위를 찬탈할 무렵, 북부에서는 네지바다두트(스멘데스)가 타니스에 제21왕조를 열

어 이집트는 양분되었다. 그후 리비아 출신의 일족이 중 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세력

을 폈으며 곧이어 시샤크(셰숑크) 는 삼각주지대의 부바스티스를 근거로 제22왕조를 일으켰다.

그 후의 제23 ·24왕 조는 리비아인이 지배하였는데 분립의 기운은 삼각주지대까지 미쳐, 제22 ·제23 왕

조는 병립하였다. 제25왕조는 나파타에서 일어난 에티오피아인의 왕조이다.

BC 671∼BC 664년 이집트는 세 번에 걸쳐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테베는 두 번 점령되었다. BC 664년 프

삼티크 1세가 삼각주지대의 사이스에 제26왕조를 열었다.

그는 그리스인의 힘을 빌려 아시리아인을 추방하고 삼각주지대를 통일, 곧 남부에 까지 손을 뻗쳤다. 왕

은 그리스인들의 삼각주지대에서의 식민(植民)을 허용하였 으므로 곧 나우크라티스가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고왕국시대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복고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사이스왕조는 한때 예술면에

서도 우수한 복 고적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네코 2세는 카르케미시에서 신바빌로니아에 대패하여 세력을 잃었다. BC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

스에 의하여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한 속주가 되었다 (제27왕조).

그 후 한때 이집트는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모두 짧은 기간으로 재차 페르시아의 세력하에 놓여졌으며 결

국 BC 332년 정복되어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 시대는 끝났다.


프텔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는 BC 305∼BC 30년까지를 말한다. 알렉산드 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

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왕이 임명한 이집트 태수(太守) 클레오메네스를 추방하고 스스로 신왕

조를 건설하였다. 신왕조 밑에 서 이집트는 재차 번영을 되찾았다.

왕은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고 학자 ·상 인 ·공장(工匠) ·용병(傭兵)을 그리스에서 이주시켜 이

곳을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지로 삼았다. 그 때문에 유리와 금속공업이 발달하였고, 각지와의 무역도 성

행하 였다.

또한 아카데미나 부속의 대도서관을 세움으로써 학예면에서도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국토의 지배에 있어서는 이집트 종래의 노모스를 단위 로 하는 통치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장관

에는 그리스인을 임명하였다. 그리스어 (語)가 공용어로 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종래의 토착어가 사용되

었고, 종교면에 서도 많은 외국풍의 신들이 이집트로 도입되었으나, 그 이름이 이집트 고래의 신 의 이름

에 적용되는 데 그쳤다.

몇 개의 대신전이 이 시대에 건립되었으나 신전에 새겨진 왕들은 이집트왕의 칭 호를 채용하였고, 그 이

름은 카르투슈(王名額子)에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 스 문명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리스세계와의 접촉도 차차 적어 졌기 때

문에 결국 이집트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였다. BC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망

으로 끝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제국치하(BC 30∼641)〉 BC 30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이후,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치하를 포함하여 약 700년 동안, 이집트 는 로마의 속주였다.

그 동안에 이집트는 로마에 대한 곡물과 기타의 공급원의 역 할을 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고통스러웠으

며, 특히 로마제국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탈취는 극심해졌다. 그 때문에 도망자가 늘고 국유지는 황폐

하여 점차 대토 지 소유자에게 옮겨갔다.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집트를 몇 개의 주(州)로 분할하였다. 로마인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행정 ·재정 ·사법을 그대로 채용하여 정책면에서도 프톨레 마이오스왕조의 것을 발전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공 용어로 채용되었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

나 알렉산드리아는 철학 ·문헌학 ·종교학 ·수학 ·공학 ·의학 등이 크게 발전하 여 학예분야에서는

지중해에서 중심적 존재였다. 그리스도교도 밀라노 칙령의 포 고와 함께 이곳에서 발전하였다.

특히 이집트인은 미술분야에서 그것을 꽃피웠는 데 아라비아인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도를 콥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미술 을 콥트미술이라고 한다. 그것은 특히 이집트 북부를 중심으로 5~6세기경에 번

영 하여 건축 ·조각 ·회화 ·공예(자수 ·직물 ·도기)에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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