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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린먼로 이전에 금발의 라나터너

연예뉴스................/해외연예단신

by 디자이너-이충길 2014. 10. 2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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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의 일이다. 할리우드의 ‘은막의 전설적인 여성(legendary lady of screen)’ 라나 터너(Lana Turner, 1925~1995)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전기영화에 캐서린 제타 존스가 ‘라나 터너’ 역으로 캐스팅되자 샤론 스톤이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라나 터너는 관능적인 연기로 1960년대 할리우드의 은막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라나 터너 역을 소화할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다. 나는 악녀(惡女)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라나 터너 역을 완벽히 소화할 적임자는 바로 나다.”

스톤은 모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생전의 터너와의 친밀한 관계를 들먹이며 “나는 터너가 죽는 해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배우인 사람이고 나는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 우리는 너무나 잘 맞았다”는 말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는 또 “당시 터너는 만약 앞으로 자신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내가 그녀의 역할을 하길 희망했다”며 “터너의 삶은 할리우드의 그 어떤 것보다 흥미롭고 나 역시 그 역할을 하고 싶고, 적임자”라며 고양이 발톱을 세웠다.

1950~1960년대 뇌쇄적인 매력을 지닌 스타 라나 터너는 영화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를 비롯해 <공포의 시바>, <마담X >, <사랑이 머무르는 계절>, <슬픔은 그대 가슴에> 등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그야말로 은막의 전설적인 여배우로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다. 1995년 암으로 죽기 전까지 60편 이상에 출연했으며 무려 8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하면서 떠들썩한 사생활로도 유명했다.

특히 훗날 리메이크한 <우편배달부…>는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대공황기의 미국 소도시를 배경으로 추악한 욕망들이 빚어낸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1947년에 만들어진 작품을 다시 재구성한 작품인데 원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성적 욕망, 그리고 야수와도 같은 폭력성의 묘사가 일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다소 퇴폐적이고 외설적이지만 다른 에로 영화에 비해 스토리 전개가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자신의 불륜의 관계 때문에 남편을 살해하려는 여인 제시카 랭(라나 터너가 했던 역을 함)을 중심으로 대공황 시기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영했다.

국내에서 개봉됐을 때 외화 흥행 1위를 기록한 이 영화는 특히 제목에 붙은 ‘우편배달부’라는 단어 때문에 집배원들의 집중 항의로 ‘포스트맨’으로 바꾼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또 당시만 해도 대학가에는 대학생들의 집회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사복 경찰들이 상주하던 시대였다. 대학가에서는 이런 상황을 비꼬아서 ‘폴리스맨은 무전기를 두 번 두드린다’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라나 터너의 장점은 무엇보다 관능적인 몸매였다. 이미 ‘스웨터 걸(sweater girl, 가슴 불룩한 처녀)’이라는 별명으로 이러한 영화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았던 할리우드 최고의 미녀 배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를 끈 여배우였다. 섹스 심벌로 브리짓 바르도, 마릴린 먼로 등과 같이 대표적인 핀업 걸(pin-up girl)이었다. 미군들의 사물함에는 어김없이 그녀의 관능적인 몸매를 담은 사진이 붙여 있었다.

남편을 살인하는 간부(姦婦) 역을 맡은 <포스트맨…>에서 뿐만 아니라 알코올 중독에 걸린 여배우 역을 맡은 <악인과 미인>, 그리고 신경과민의 어머니 역을 맡은 <페이턴 플레이스 Peyton Place>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터너가 맡았던 배역 역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그대로 반영됐다.

할리우드를 빛낸 수많은 여배우들 가운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마약, 알코올, 이혼 등으로 씁쓸하게 은막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많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파란만장하게 기구한 삶을 산 여배우라면 단연 라나 터너다.

라나 터너가 관객의 뇌리에 지워질 수 없는 인상을 준 것은 <포스트맨은 두 번 벨을 울린다>에서 불륜을 저지른 남자를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연기에서부터다. 그녀의 본명은 밀드레드 터너(Julia Jean Mildred Frances Turner). 아버지는 광부였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터너를 낳았다. 아버지는 웬만큼 돈을 벌었지만 놀음에 빠져 집안은 늘 가난에 허덕였다.

터너가 6살이 되던 1930년, 아버지가 오랜만에 주사위 게임(craps game) 도박판에서 돈을 좀 땄다. 돈을 왼쪽 양말 속에 쑤셔 넣고는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으스대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들길 한 모퉁이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놀음판에서 딴 돈을 쑤셔넣은 그의 왼쪽 양말과 신발은 없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훔쳐간 범인은 끝내 밝혀내지 못한 채 미궁의 사건으로 종결됐다.

아버지가 죽던 해 어머니와 터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의사가 좀 더 건조한 기후가 좋다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터너는 원래 목이 자주 아팠다. 훗날 그녀는 인후암(throat cancer)으로 세상을 뜨는데, 그 징후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듯하다.

로스앤젤레스의 생활은 고달픈 하루의 연속이었다. 대공황기가 생활을 여간 핍박한 게 아니었다. 어린 터너는 어머니와 한동안 혼자 떨어져 지낼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머리손질은 물론 손님이 원하면 화장을 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어머니는 훗날 터너의 할리우드 전속 매니저(overseer)로 일하게 된다.

가난한 터너가 할리우드에 스카우트된 평범하지 않은 일은 하나의 전설로 통한다. 당시 16살의 금발머리 소녀 터너는 할리우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지겨운 타이핑 수업시간을 빼먹고서는 거리 공원으로 나와 콜라를 사서 홀짝홀짝 맛있게 들이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할리우드 리포터(Hollywood Reporter)』라는 당시 가장 유력한 할리우드 영화잡지 발행인 윌리엄 윌커슨(William Wilkerson)의 눈에 띄게 된다. 윌커슨은 터너의 미모, 그리고 특히 글래머 스타일의 몸매를 보고 앞으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윌커슨은 배우, 코미디언, 탤런트를 관리하는 제포 막스(Zeppo Marx) 에이전시에 소개했다. 흡족하게 생각한 이 에이전시는 터너와 즉시 전속계약을 체결하고는 그녀를 영화감독인 머빈 르로이(Mervin Leroy)에게 소개했다. 그야말로 일순간에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17세의 나이에 <그들은 잊지 않을 거야(They Won’t Forget, 1937)>로 영화에 데뷔한 후, <지그펠드 극장의 소녀(Ziegfeld Girl,1941)>에서는 쇼걸로 출연했다. 이때부터 언론매체들은 그녀의 고혹적이고 확 튀는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2편의 영화 <싸구려 카바레(Honky Tonk, 1941)>, <어디에서인가 너를 찾아낼 거야(Somewhere I’ll Find You, 1942)> 등에서는 당시 할리우드의 왕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클라크 게이블의 상대역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조니의 열망(Johnny Eager, 1942)>에서는 갱 단원의 정부(情婦) 역을 잘 소화해 배우로써 자질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고혹적인 성적 매력이 가장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역시 <포스트맨은…>에서였다. 당시 나이 겨우 22세였다.

그녀의 화려한 인생이 시작됐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남자와 사랑을 즐겼다. 그러나 사생활은 비극 자체였다. 일곱 명의 남자와 여덟 번의 결혼을 하는 등 평안할 날이 없었다. 음악가이자 밴드 리더인 첫 남편 아티 쇼우(Artie Shaw)와 사랑에 빠진 것은 19살 때였다. 그녀는 이 남자와 헤어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풋사랑’이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남편은 커다란 식당을 운영하는 조셉 크레인(Josef Stephen Crane)이었다. 당시 터너는 전남편 쇼우와 법적으로 이혼정리가 안 돼 있어 법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그러나 결국 결혼에 성공해 유일한 딸 셰릴 크레인(Cheryl Crane)을 얻게 된다. 이 딸의 살인자가 될 줄이야.

백만장자였던 헨리 토핑(Henry J. Topping)은 다이아몬드로 그년의 환심을 사 결혼한다. 그러나 투자 실패와 도박으로 재정이 파탄이 나자 이혼도장을 찍고 말았다. 다시 영화 <타잔>의 히어로 렉스 바커(Lex Barker)와 결혼했지만 다시 이혼했다. 이유는 바커가 딸 체릴을 성희롱하고 강간했다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만나 결혼한 사람은 나이트클럽에서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는 최면술사 로날드 펠라(Ronald Pellar)였다. 그러나 펠라는 결혼하지 6개월도 안돼서 집을 나가버렸다. 터너가 사업을 해보라며 3만5000달러를 주었는데 사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돈을 갖고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훗날 터너는 이 ‘불한당 같은 놈’이 10만 달러에 이르는 보석을 훔쳤다고 고소했다.

할리우드의 은막의 여왕 라나 터너의 사생활은 이처럼 엉망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마피아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폭력배 조니 스탐파나토(Johny Stompanato)의 잘생긴 외모와 용감무쌍한 기질에 반했다.

세기의 미스터리 범죄는 이렇게 시작됐다. 왜냐하면 스탐파나토가 터너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것도 딸 체릴 크레인 이 찌른 식칼에 의해.

미국 사회에서 선과 악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곳은 단연 할리우드다. 그 속에는 영광과 좌절이 있다.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한 없이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숨어 있다.

가난한 광부의 딸에 불과했던 그녀가 어떻게 은막의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글래머의 화신으로 말이다. 가능하다. 할리우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20세기의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지는 곳이 할리우드다. 돈과 명예를 거머쥔 라나 터너가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남자를 통해서였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할리우드의 최고 스타가 무엇을 위해 주위 눈치를 보겠는가?

7명의 남자를 갈아치우면서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얄궂게 표현해서 어떤 흥미나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여준 그녀의 역할이 고스란히 그녀의 인생역정으로 나타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할리우드 스타의 탄생을 예고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가 그렇다. 자신과 불륜관계를 저지른 남자를 위해서 남편을 무참히 살해하는 역이다. 아마도 그녀는 영화 속의 장면처럼 남편을 살해했는지도 모른다

남편들 외에 터너를 스쳐간 남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식적으로 결혼관계를 유지한 남자만 7명일뿐이다. 물론 불운하게 끝났지만 그 가운데서도 터너는 스톰파나토를 제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터너가 스톰파나토를 만난 것은 4번째 이혼을 한 직후였다. 그녀가 결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했고, 특히 돈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마음속에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와는 색다른 남자를 만날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돈은 없더라도 나를 잘 이해해 주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남자들에게 지쳐 있었고 안정을 취하고 싶은 순간 스톰파나토가 나타났다. 터너는 그의 자서전에서 스톰파나토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깊게 자리잡게 됐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1957년 난 조니(Johnny, 스톰파나토)와 첫 통화를 하면서 그가 내 인생 깊숙이 자리 잡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그는 날마다 나에게 꽃을 보냈다. 그는 또 너무나 신기하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 알고 있었다. 나에게 레코드들을 자주 보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사랑을 편지로 보낸 사람은 아마도 스톰파나토가 처음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내 생애에 ‘가장 더러운 시간(the blackest period)’이 시작됐다”고 그녀는 썼다. 다시 이어서 그녀는 “(그와의 나의 인생은) 꽃으로 시작돼 격의 없는 술자리 초대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신문의 선정적인 헤드라인(screaming headlines), 그리고 비극과 죽음으로 끝나고야 말았다”고 썼다

약간 곱슬머리에 태양에 그을린 올리브 피부의 스톰파나토는 얼굴, 몸매에서 할리우드의 어떤 남자 배우 못지않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여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기둥서방의 본보기였다.

2차대전을 전후해서 할리우드 배우들은 군부대를 자주 방문했다. 일종의 장병(將兵)들을 위한 위문공연이다. 우리의 경우 월남전 당시 국내 연예인들의 월남위문공연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이러한 공연 속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 배우가 바로 라나 터너다. 이러한 대중 공연에서 터너는 스톰파나토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최고의 스타도 여자를 유혹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던 스톰파나토에게는 단순한 먹잇감에 불과했을 뿐이다. 우리의 표현으로 대단한 ‘제비’(gigolo)였다

스톰파나토의 배후에는 LA를 주름잡던 갱스터 미키 코헨(Mickey Cohen)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스톰파나토는 코헨의 부하였다. 물론 스톰파나토의 죽음으로 미궁에 빠졌지만 스톰파나토를 터너에게 접근시킨 것이 코헨의 작품이라는 지적도 많다.

돈 많은 여자에게 접근해서 돈을 갈취한 뒤 다시 헌신짝처럼 버리는 스톰파나토는 이미 경찰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터너는 아마 모든 사랑이 그런 것처럼 눈이 어두웠다. 아니 알면서도 그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터너가 누구인가? 남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할리우드의 최고의 육체파 배우였다. 사실 그는 마릴린 먼로, 브리짓 바르도를 훨씬 능가하는 스타였다. 스톰파나토가 단순히 돈을 노려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결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상상이었다. 사랑을 노려 접근한 것이지 돈을 노려 자신에게 다가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자존심은 완전히 빗나갔다.

라나 터너와 잘생긴 애인 스톰파나토와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1957년 가을의 일이다. 터너가 영화 촬영을 의해 영국으로 가게 되자 스톰파나토도 따라 나섰다. 사랑하는 연인이 외국으로 가는데 동행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보기가 좋은 일이다. 사랑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당시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 터너가 영국에서 촬영하는 영화는 1958년에 개봉된 <낯선 곳, 낯선 시간(Another Time, Another Place)>이라는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였다. 물론 배역은 당연히 주연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터너의 애인이자 남자 주인공이 바로 뭇 여성들이 동경하는 미남배우이자 훗날 제임스 본드로 잘 알려진 숀 코네리였다. 영화 속에는 육체적으로 아주 선정적인 장면은 없으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많았다.

이차대전 당시 터너(미국의 여기자)와 코네리(영국 기자)는 둘 다 종군기자로 유럽에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연인 사이로 진전된다. 터너는 자기가 소속돼 있는 신문사의 돈 많은 사장과의 관계를 끊고 코네리와 결혼을 할까를 두고 망설이다가 결국 코네리를 택한다는 내용이다.

터너의 바람기 많은 남자친구 스톰파나토는 두렵고 질투가 났다. 물론 영국에서 영화 때문에 만난 당시 최고의 여배우 터너와 남자배우 코네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스톰파나토는 두 사람 사이를 의심했고, 그래서 터너와의 불화가 시작됐다.

여자를 유혹해 돈이나 갈취해 왔던 불량배 스톰파나토는 터너가 코네리와 불륜을 저질렀다며 털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터너는 한사코 부정했다. 또 그렇다고 불량배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용서를 구할 터너도 아니었다.

스톰파나토의 폭력과 학대는 점차 심해졌다. 그는 심지어 장전된 총을 터너의 머리에 갖다 대며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했다. 점점 되돌릴 수 없는 파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스톰파나토는 영화 촬영을 위해 터너와 코네리가 연기하는 촬영장까지 총을 갖고 가서 행패를 부렸다. 코네리와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코네리는 참다못해 난동을 부리는 스톰파나토의 턱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하고는 총을 빼앗았다. 스톰파나토는 턱뼈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스톰파나토는 스코틀랜드 법정으로 즉시 호송됐고, 터너와 그녀의 애인 불량배와의 관계가 언론의 주목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너는 이제 어떤 방법을 써서든 간에 스톰파나토와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스톰파나토의 두목이자 암흑가의 대부인 코헨이 검은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터너가 소속된 스튜디오를 인수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최고의 인기배우 터너를 자신의 발밑에 두고 마음대로 하면서 할리우드를 장악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터너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터너가 그렇게 증오한 스톰파나토는 이렇게 죽었다; “영국에서 영화 촬영을 마친 이듬해인 1958년 4월 어느 날. 터너는 비버리힐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그녀를 찾아온 스톰파나토와 심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터너의 딸 체릴 크레인은 어머니가 저렇게 맞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다고 두려워한 그녀는 부엌으로 가 식칼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방어하기 위해 스톰파나토에게 달려들었다. 칼은 그의 위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피를 흘리던 스톰파나토는 곧 의식을 잃고는 쓰러져 죽었다.”

당시 딸 체릴의 나이는 14세의 어린 소녀였다. 이런 어린 소녀가 휘두른, 그것도 아주 예리한 칼도 아닌 부엌칼에 찔려 그나마 힘이나 쓴답시고 까불대던 불량배 스톰파나토는 한 순간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스톰파나토가 터너의 자택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언론에 보도되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많은 소문과 추측들이 떠돌았다. 터너가 진짜 범인이고 딸과 공모하여 딸이 찔러 죽였다는 각본을 짰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법정은 이러한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터너의 손을 들어주었다. 변호인의 주장에 따라 법은 딸의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justifiable homicide)’으로 판결을 내렸다. 또한 터너를 상대로 7백만 달러를 청구한 스톰파나토의 가족의 고소도 기각했다.

터너는 스톰파나토가 살해된 후 어떠한 동요도 없이 바로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그의 생애가운데 가장 걸작품 가운데 하나로 1959년에 개봉된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서 능숙한 연기를 펼쳤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배우를 지망하는 백인 미망인 로라(Lora Meredith: 라나 터너)와 그녀의 딸 수지(Susie: 샌드라 디)는 우연히 흑인 미망인 애니(Annie Johnson: 주아니타 무어)와 그녀의 혼혈아 딸 사라(Sara Jane: 수잔 코너)와 같이 살게 된다.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지던 로라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진작가 스티브(Steve Archer: 존 가빈)를 만나 프러포즈를 받는다. 그러나 무대에 설 기회를 잡은 로라는 스티브의 손길을 뿌리치고 스타의 길을 선택한다. 몇 년 뒤 스타가 된 로라는 스티브와 재회하고 다시 사랑을 싹틔우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수지 역시 스티브를 사랑하게 된다. 한편 피부 색깔이 백인에 가까운 사라는 엄마가 흑인임을 숨기고 한 남자와 사귀다가 비밀이 드러나면서 비참하게 버림받는다. 엄마를 수치스러워하며 가출한 사라는 밤무대의 댄서가 된다. 딸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애니는 사라를 그리워하며 죽음을 맞는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배역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너는 자신이 생의 끝자락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화려하게 할리우드의 은막에 등장해 전설을 남긴 그녀에게 배역이 줄어든다는 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렀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중년 여인이나 할머니로 조연을 맡아 할 인물도 아니었고, 그러한 배역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가 그녀의 나이 막 마흔이 되던 해다. 1982년부터 2년간 TV 시리즈 <파콘 크레스트(Falcon Crest)>에 주역을 맡은 것을 끝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스톰파나토를 찔러 죽인 터너의 딸 체릴은 엄마의 애인을 처음에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자. 그녀가 훗날 쓴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스톰파나토는 잘생기기도 했지만 건장했다.

“정말 잘생긴 남자다. 건장한 체격에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 말은 언제나 짧으면서 깊은 바리톤 목소리였다. 별로 미소를 짓지 않으며 크게 웃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것을 휘감는 듯하다. 짙은 눈썹의 그의 눈을 보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널찍하며 조금은 늘어진 비단으로 된 슬랙 셔츠, 가는 가죽 벨트에 은색 버클, 그리고 도마뱀 가죽구두가 그의 전형적인 옷차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는 점차 허물어져 갔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자. 터너의 딸 체릴이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으로 무죄를 받은 것은 어머니가 폭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스톰파나토를 찔렀다는 이유가 아니다. 체릴이 의붓아버지 스톰파노트를 찔렀을 때 터너는 약간은 떨어진 다른 방에 있었다. 스톰파나토가 그날따라 이상한 생각을 먹었는지 체릴을 성폭행하려고 그녀를 공격했다. 그러나 부엌으로 가 칼을 들고 왔고, 그래도 성폭행하려는 스톰파나토의 배를 찔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당방위가 인정이 된 것이다.

너무나 놀란 딸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터너가 방문을 열고 체릴이 울고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오, 맙소사! 체릴, 너가, 너가 이런 짓을 하다니!” 터너는 칼을 뺏어 싱크대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의식이 없이 숨을 헐떡이는 스톰파노트를 발견하고는 가정의(home doctor)와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잠시 후 의사와 그녀의 어머니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터너가 죽어가는 스톰파나토를 살리기 위해 그의 입에 숨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의사는 스톰파나토의 심장에 아드레날인을 주사했다. 그러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과연 불량배 스톰파나토는 체릴을 성폭행하려다가 그녀가 휘두른 부엌칼에 찔려 죽었을까? 스톰파나토는 과연 터너가 있는 집에서 딸을 폭행하려 했을까? 그러나 법은 터너의 손을 들어주면서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겼다.

콜라를 마시다가 발탁돼 할리우드의 전설과 신화가 된 터너는 그의 작품 <슬픔은 그대 속에, Imitation of Life>처럼 인생을 흉내 내고 모방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 그녀의 간판 브랜드이자 그녀를 할리우드에 우뚝 세운 <우체부는 벨을…>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남편을 죽이는 잔인한 여성처럼 현실에서도 한번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대단한 연기자였다. 그러나 언론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만큼 훌륭한 연기는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녀는 74세의 일기로 죽을 때까지도 대단한 애연가였다.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할리우드의 영광과 좌절이다.

김형근 편집위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09.10.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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