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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작업장을 드나

사진자료................/사진 갤러리

by 디자이너-이충길 2016. 6. 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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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작업장을 드나들며 돌이 어떤 형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즐겨 보곤 했다.

가난한 마을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요즈음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그저 학업에 열중하여 집안을 일으킬 고급 관리가 되길 원했지만, 바람과 달리 아들이 미술에 눈을 뜨자 크게 분노하였다. 아버지는 후원자들의 비위나 맞추며 살아갈, 기껏해야 손재주 좋은 장인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아들을 매질을 해가며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식 이기는 장사 없다고,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손을 이끌고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가이자 금세공업자였던 기를란다요의 공방으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들이 훗날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과 맞장을 뜰 정도의 위대한 미술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과 나머지 두 아들이 벌여놓은 이런저런 사고들을 미켈란젤로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열심히 막아주리라는 것도.

위대한 천재 미술가들의 ‘전설 따라 삼천리’는 늘 거기서 거기, ‘어린 시절부터 출중한’이라는 수식어는 미켈란젤로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세 살 무렵부터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운 그는 금세 스승도 질투할 만큼 그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먼 훗날 그 스스로 밝혔듯이 “거기서 나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1년 만에 공방을 떠나게 된다.

미켈란젤로 〈다윗 상〉

대리석 / 높이 409cm / 1501~1504년 제작 /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 피렌체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실세인 메디치 가문이 산마르코 성당 정원에 세운 조각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로렌초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뿐 아니라 각 도시 공국 그리고 교황청의 지도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전범으로 삼는 고전주의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고, 앞 다투어 고전 조각이나 유물, 문헌 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연스럽게 메디치 가문이 모아놓은 고전 조각들의 아름다움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볼로냐, 시에나 등에서도 활동했지만 주무대는 단연코 피렌체와 로마였다. 스물다섯 남짓한 나이에 로마에서 〈피에타〉를 완성하면서 세간의 환호성을 자아낸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40년 동안 방치되었던 골칫덩어리 대리석으로 4미터 높이의 〈다윗 상〉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그는 피렌체의 또 다른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나란히 시의회 벽면을 장식할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다. 만약 그 작품들이 완성되었다면 오늘날 피렌체를 찾는 방문객의 수는, 지금도 폭발 직전이지만, 그 몇 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너무 대단해서 이리저리 후원자들에 불려다니느라 작품을 끝내지는 못했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대리석 / 높이 174cm / 1499년 제작 / 성 베드로 성당, 바티칸


미켈란젤로가 시의회 벽면을 위해 〈카시나 전투〉의 밑그림을 완성하던 해, 로마의 교황 율리오 2세는 그를 불러 자신이 죽어 묻힐 공간, 즉 영묘 장식을 주문했다. 조각가로서의 자부심에 불타던 미켈란젤로는 의욕적으로 제작에 착수했다. 그해 1505년 4월,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는 카라라에 여덟 달 동안 머물면서 대리석을 캐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40여 점 이상의 영묘 조각과 청동 부조들로 교황의 무덤을 꾸밀 예정이었으나 교황은 제때 제작비를 지불하지 않았고, 미켈란젤로가 평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브라만테와 함께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원작을 아리스토틸레 상갈로가 모사 〈카시나 전투〉 중앙 부분

패널에 유채 / 77×130cm / 1505년 제작 / 호크햄홀, 노포크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영묘 조각에서 관심이 멀어진 이유가 브라만테의 꼬드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교황의 변심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심지어 브라만테 일당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는 로마를 떠나버린다. 하지만 교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가 훗날 표현했듯이 ‘목에 줄이 감긴 채 용서를 빌 것을 강요’하면서 그를 다시 불러들였는데, 오죽하면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 피에르 소데리니(Pier Soderini, 1450~1522)에게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피렌체를 침공하겠다는 엄포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마침 볼로냐를 방문 중인 율리오 2세를 찾아가 고개를 조아려야 했고, 볼로냐에서 교황의 동상을 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 동상은 훗날 볼로냐를 침공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대포알을 만들기 위해 파괴해버렸다. 이후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장식을 명령했다. 평소 화가이기보다 조각가로 불리길 원했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의식해 “만약 회화가 조각보다 고귀하다고 쓴 사람이 다른 사물도 그 정도 수준에서 이해한다면, 그는 우리 집 하녀만도 못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한사코 천장화 작업을 맡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라파엘로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슬쩍 발을 빼기도 했지만 교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이 고집스러운 주문이 자신을 시기한 라이벌 브라만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형 프레스코화 제작에 경험과 관심이 적은 자신으로 하여금 이 일을 기어이 맡게 해서 실패를 유도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브라만테에 대한 분노 탓에 미켈란젤로는 붓을 들었다. 그는 이를 갈며 누구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던 작품으로 브라만테를 비롯한 라이벌들의 콧대를 꺾어놓겠노라 결심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한 시대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천재들이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경쟁심이 완성한 것이다.

미켈란젤로 〈론다니니 피에타〉

대리석 / 높이 195cm / 1552~1564년 / 스포르체스코 성, 밀라노


천장벽화를 완성한 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이런저런 대작들을 완성하던 중 다시 로마로 불려가 시스티나 성당 제단 정면에 결국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역작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약 23년 동안 그는 브라만테를 이어 라파엘로까지 손을 댄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에 동원되어 돔 설계를 완성했고, 파르네제 가문의 저택과 파울리나 예배당,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이어진 계단 설계까지, 건축가로서도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고향인 피렌체에서 피렌체 드로잉아카데미 원장까지 맡았던 그는 1564년에 89세의 나이로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론다니니 피에타〉를 미완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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