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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연인 네페르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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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이충길 2014. 8. 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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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연인 네페르타리=

 

“비록 규범이 그대를 여왕들의 계곡에 묻도록 규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누울 영원의 집을 신들에게서 사랑받는, 이 땅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원의 집으로 만들어 주겠소. 자자손손 사람들은 그 집을 기억할 것이며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오.”

지금으로부터 3천여년 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니 그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벌벌 떨던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로부터 이 같은 찬사를 받고, 암벽을 파내어 거대한 자신의 암굴신전을 생전에 만들어 받은 이 여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여러명의 왕비와 백여명의 후궁들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백삼십명이 넘는 자식을 둔 람세스 2세에게 있어 이 여인의 존재는 도대체 어떠했길래 람세스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이런 신전을 만든 것일까.

굳이 우리나라 사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한명의 남자에 등장하는 여인이 여럿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빚어지는 여인네들의 갈등과 암투가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기원전 1279년에서 1212년까지 무려 67년간 이집트 19왕조를 다스려왔던,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과연 그 많은 왕비들 중에 누구를 가장 총애(?)했는지는 이곳 아부심벨(Abu Simbel)에 와보면 궁금증이 싹 풀려버린다.

 
◇사진1: 아부심벨의 네페르타리 신전입구-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 왕비 석상

 

 바로 정비(正妃)인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였다. 람세스 2세에게는 네페르타리를 비롯한 최소 6명의 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중에 이제트라는 이름의 왕비가 있는데 왕비들 중 서열이 2위쯤 되는 왕비 같다. 자식을 낳지 못했던 네페르타리에 비해(왕자인지 공주인지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명을 낳았다는 설도 있다) 이제트 왕비는 왕자와 공주를 낳았으며 왕위를 계승한 것도 그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트 왕비를 기념하는 건축이나 비석은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하니 과연 람세스 2세에게 있어서 네페르타리 왕비는 여러 명의 왕비들 중의 한 명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의 여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비라는 이유 때문에, 의례적인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넘쳐날 정도로 조각상, 벽화들이 아부심벨을 비롯해 이집트 여기저기 많이 만들어져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유적 안에서도 이렇듯 자신을 위한 신전을 가진 이집트의 왕비로는 거의 유일무이 하기에 더 그 의미가 부각이 되는 것 같다. 하긴 룩소르 서안에 있는 핫쳅수트 여왕의 신전이 있긴 하다. 깎아 지를 듯한 바위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푸르디 푸른 나일강을 바라보며 웅장하게 서 있는 거대한 3층의 테라스식 신전인데 규모로는 이 신전이 더 크긴 하지만 이것은 여왕 자신이 스스로 파라오의 권위를 가지고 건립한 것이어서 람세스의 네페르타리에 대한 정성과 애정의 선물, 아부심벨 신전과는 성질이 좀 다르다고 하겠다.

 
◇사진2: 룩소르 신전 입구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와 람세스 2세


 아부심벨 신전은 이집트 최남단 도시인 아스완에서도 320km나 남쪽으로 떨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을 가다보면 열풍을 받아 빛나는 드넓은 나세르 호수가 마치 오아시스마냥 펼쳐진다. 그 옆에 자리한 이 신전은 람세스 2세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 등 두개의 신전으로 돼 있는데 신전 기둥 꼭대기에는 행복과 사랑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의 미소짓는 얼굴이 새겨져 있고 벽에는 람세스와 네페르타리와 신들이 결합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파라오와 왕비를 이어주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한다.

 "람세스 2세가 정비 네페르타리, 무트 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산을 깎아내고 불멸의 공법으로 이 신전을 지었다. 네페르타리, 태양은 영원히 그녀를 위해 빛나리라."

 네페르타리 신전 앞에 세워진 10여m에 이르는 여섯개의 거상 앞에는 대강 이러한 내용의 신성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신전을 세우고도 모자라 람세스는 그것을 다시 문자로 새겨 자손만대로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하기야 이러한 열정의 람세스가 지금 시대에 살아 있었더라면 시와 소설,음악과 영화 등 모든 방법과 기법을 총동원해 연인 네페르타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을 터이다.

 하지만 이 암굴신전은, 고대 이집트의 몰락이라는 비정한 역사의 흐름 속에 갇혀 그 기나긴 3천여년 동안을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된다. 그리고는 1813년 스위스의 여행가 부르크하트가 발견함으로써 극적으로 다시 찬란한 빛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네페르타리, 태양은 영원히 그녀를 위해 빛나리라.” 하던 람세스 2세의 글귀 그대로 현재 ‘자자손손 사람들은 그 집을 기억하며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람세스는 그 동안 이 암굴신전이 모래사막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그런 만큼 또 이렇게 애절한 자신의 사랑을 담은 신전이 3천년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날은 또 그 얼마나 기뻤을까?

고대 이집트를 빛낸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보다는 한 여인을 온전히 사랑했던 인간적인 람세스의 매력에 빠져 람세스의 거상들을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람세스 2세의 거상들은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뿐만 아니라 람세스 시대 때 이집트의 수도였던 룩소르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다. 나일강 중류에 자리잡은 룩소르는 고대에는 테베라 불리던 곳인데 지금은 초라한 작은 도시에 불과하나 이곳에 있는 파라오의 신전들과 사막 한가운데 펼쳐진 유물들을 직접 보니 과연 세계 인류문명의 역사에서 왜 “이집트, 이집트” 하는지, 그리고 람세스라는 이름 앞에 왜 ‘위대한 파라오’라는 대명사가 붙어 다니는지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수천년 전에 이처럼 불가사의한 설계를 한 고대 이집트인의 건축술이 놀랍고도 놀랍다.

 

 ◇사진3: 카르낙 신전에 있는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 석상

 

 이집트 최대의 신전이라고 하는 카르낙 신전, 그리고 람세스 2세로 인해 그 완성을 이룬 룩소르 신전은 여느 신전들과 달리 그 규모나 웅대함이 마치 고대 이집트 유적의 진수를 보는 듯 그야말로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안에 어김없이 버티고 선 람세스 2세의 거상과 네페르타리 왕비의 모습은 3천년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을 한달음에 가까이 끌어당겨주는 소설 같은 마력으로 다가왔다.

 룩소르 서안에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이 있다. 그 왕가의 계곡에 파라오들의 무덤이 있고(투탄카문, 람세스 3세, 람세스 6세, 아메노피스 2세, 투트모스 3세 등 60여개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다.) 그 안에 람세스 2세의 무덤이 있다. 남서쪽으로 1.5킬로 떨어진 그 너머 저편에 왕비의 계곡이 따로 있는데 (BC 1300~AD 1100년 경에 만들어진 왕비와 왕자의 무덤들로 72개의 무덤이 있다.) 그곳엔 네페르타리의 무덤이 있다. 다른 몇몇 무덤은 들어가 볼 수 있었으나 공교롭게 우리가 갔을 때 이 둘의 무덤은 개방되지 않아 바깥에서만 모습을 보아야 했다.

 어느 무덤이고 간에 무덤이라는 낱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한켠이 황망해지건만 빛나는 영광의 세월을 살았던 이들의 무덤은 살아생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화려한 유적만큼이나 정말로 쓸쓸함 그 자체였다. 어찌 이리도 고립무원일 수가 있을까. 도굴을 두려워한 나머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마치 죽음의 땅을 연상시키는 메마른 돌사막 한가운데를 자신들의 무덤자리로 만들어 외지고 황량한 바위산을 스스로 파고들어가 누웠으나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텅텅 빈 채 돌석관 한 개만이 쓸쓸하게 파라오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하늘을 찌를 듯 쌓아올린 피라미드 안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뒤 다시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을 정복하고자 애썼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사후생활이란 형태 없는 영혼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죽은 자를 그대로 보존하고자 만들었던 미이라, 무덤, 무덤 속의 벽화들, 사자의 서, 피라미드, 스핑크스, 그리고 무덤 안의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유품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을 열어주는 열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죽은 자를 미이라로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완벽하게 무덤 속으로 들어가 죽음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사후세계로 떠나기까지 이들의 장례문화 하나하나의 절차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진4: 파피루스에 그린 네페르타리 왕비(왼쪽)와 사랑의 여신 하토르


 사람의 머리를 중요시 여겨 미이라의 머리에 가면을 덧씌우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영생을 사는 동안 손과 발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도록 스무개의 손가락 발가락 싸개까지 만들 정도이니 고대이집트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과 집념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간다. 그러할진대 무상한 세월은 파라오들 만큼이나 집요한 도굴꾼과, 의미는 다르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기어코 파헤쳐지고 급기야 무덤 속 남은 유품과 미이라들은 이집트를 비롯한 전 세계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져 전시되어 있으니… 죽은 자는 한낮에는 무덤 속에 있지만 해가 지면 그의 영혼은 살던 집과 사랑하는 가족을 자유로이 찾아다닌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세계관으로 본다면 혼령들이 자신의 누울 집을 못 찾아 허공을 떠돌고 있지는 않을지…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카이로의 고고학 박물관 미이라실에 누워 있었다. 거대한 석상으로 보여진 람세스 2세는 생전의 그의 행적과 스캔들(?) 만큼이나 외모 또한 너무도 멋지고 우람하여(파라오들의 석상이라는 것이 실은 모습이 다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석상의 모습만 가지고는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 당시 최고의 힘과 정열의 상징으로 조각해논 것 같다. 오죽했을까. 그 이름도 파라오이거늘…) 아부심벨의 여인 네페르타리를 비롯한 3천년 후의 여인(?)에게까지 마치 살아있듯 그의 멋과 위용을 드러냈다면, 내가 본 실제 람세스 2세 미이라의 모습은 근엄한 얼굴을 한 채 반쯤 눈을 감고 양손을 가슴에 얹고 누워있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70대 범부(凡夫)로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소설속의 환상을 여지없이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람세스 2세를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패배한 적의 손발뿐만 아니라 성기까지 잘라와 그 또한 고대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난폭한 정복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살아생전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했던 인간으로서 그의 광기어린 집념은 수많은 신전과 유적을 만들어내긴 했으나, 가는 곳마다 그 앞에서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 이면에 동시에 함께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몇십년, 심지어 몇백년에 걸치는 큰 공사를 순전히 사람의 힘을 모아 이루어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사막 한가운데서 말이다.

 인간의 욕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바위 같은 무게의 커다란 돌덩어리를 하나 하나 지극정성으로 다듬고 정교하게 쌓아 산을 이룬 저 피라미드 꼭대기가 파라오의 욕망의 정점일까. 그 안에서 무모하리만치 희생된 수도 없을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피라미드가 되고 거대한 신전이 되었을 터, 이건 어떠한 명분과 거룩한 목적이 있었을 망정 그 과정이 바르지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는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이 아부심벨 신전이 30여년 전 아스완 댐공사로 나일강 물에 잠길 뻔한 것을 인류가 힘을 합쳐 구출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이 신전은 유네스코가 전세계 50여개국의 도움을 받아 해체한 뒤, 60여 미터나 위로 끌어올려 다시 똑같이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하니, 이 신전을 세운 인간 람세스도 대단하지만, 3천년 뒤의 인간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람세스의 네페르타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감복해 화답한 것일까, 아님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한 파라오의 허영과 욕망 아래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의 결정체인, 이 문화유산을 오롯이 살려내고자 했음일까.

 어떻든 지구상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애절한 사랑이 있지만 아부심벨에 얽힌 왕과 왕비의 사랑이야기도 참으로 거대하고, 오래되고, 극적인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랑을 주고받은 람세스와 네페르타리,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하나로 엮어준 아부심벨 신전은 파라오와 왕비라는 그 신분의 의미보다도 한 여인에 대한 지극한 지아비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더 인간적인 의미가 크게 와 닿는 것 같다.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파라오 람세스 2세! 참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사로잡은 네페르타리 왕비 역시 참 대단한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람세스의 여러 왕비(9명이었다고 그러네요)중 정비였던 네파르타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별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책과 자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네요.

여러 이야기 중 그 대강을 추려보면,

1. 테베에서 정략 결혼의 차원에서 시집 온 여인이라는 설
2. 평민 출신으로 왕비가 되었는데, 타고 난 기품과 우아함등으로 왕과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설,
3. 귀족 출신의 여인으로 역시 왕의 총애와 온 국민의 사랑을 차지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이상으로, 출신과 계급등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 듯합니다. 다만 그녀가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사실과, 남아 있는 두상에서 알 수 있듯이 빼어난 외모와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만은 공통적 사항인듯 합니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쟈크의 소설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에 의한 부분이 많으니까 참고 정도로만 하시고, 소설 속의 장면들을 모두 사실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좀 주의하실 필요가 있겠지요...
람세스에 대한 부분도 정확한 역사적 고증 보다는, 소설적 재미를 위해 년대나 기타 사실이 가상적으로 꾸며진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벽화에 묘사된 네페르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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