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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Laos) 사회주의 국가,프랑코포니,라오스,내륙국,공산주의 국가,국제 연합 회원국,프랑스어권

라오스로 떠나자......./라오스소개

by 디자이너-이충길 2014. 8. 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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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 인민 민주 공화국 (라오어: ສາທາລະນະລັດປະຊາທິປະໄຕປະຊາຊົນລາວ 사타라나랏 빠싸티빠타이 빠싸쏜 라오, 문화어: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며, 북서쪽에는 미얀마중국, 동쪽에는 베트남, 남쪽은 캄보디아, 서쪽은 타이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내륙국이다. 인구는 2009년 기준으로 약 68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라오스의 역사는 14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존재하고 그 이후 세 개의 독립된 국가로 나뉜 란쌍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3년, 비엔티안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싹 왕국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연합되었다. 1945년, 일본군의 점령 이후 잠시 독립을 했으나, 1949년 다시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54년, 라오스는 독립해 입헌군주국인 라오스 왕국이 되었다. 하지만 독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라오스 내전이 일어나고 1975년, 라오스 왕국은 없어지고 공산주의 단체인 파테트 라오에 의해 공산국가가 설립되었다.

라오스는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이다. 수도는 비엔티안이다. 다른 큰 도시로는 루앙프라방, 사반나케트, 팍세등이 있다. 공용어는 라오어이다. 라오스는 아시아 태평양 무역협정,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동아시아 정상, 프랑코포니의 회원국이다. 1997년 WTO에 가입했다.

 

면적: 236,800 KM2 (81위)

인구: 5,924,000명 (2005년)

 

라오스의 역사

 

라오스의 역사는 13세기에 중국 남부에서 살던 타이계 민족의 하나인 라오족이 지금의 라오스 영토로 이주해 온 것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메콩 강 유역에서 살았으며, 특히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참빠삭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353년에 크메르 왕국의 지원을 받고 메콩 강 유역에 란상 왕국이 등장하였다. 란상 왕국의 지도자였던 파눔 왕은 크메르 왕국이 약해지자 독립을 선언하였고, 불교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술리나봉사 왕 때 크게 번영했지만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18세기초에 급격히 몰락하여 란상 왕국은 3개로 분열되고 친 타이 세력과 친 베트남 세력의 대립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때 비엔티안 왕국의 차오아누 왕은 영국이 타이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타이정벌에 나셨다. 하지만 1828년에 타이비엔티안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지어 국왕도 타이에 끌려가 감옥에서 살았다. 비엔티안 왕국의 왕 차오아누는 1829년 감옥에서 죽었다. 결국 분열된 라오스는 타이베트남의 지배를 받게 된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대부분이 타이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타이 정부로부터 메콩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어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미얀마로 가는 길을 개방하였다.

 

라오스 내전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는 급격히 혼란해졌다. 라오스의 독립파는 라오이싸라, 즉 공산정당을 만들어 라오스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라오이싸라는 베트남 공산정권인 베트남민주공화국과 긴밀하게 유대했다. 프랑스와 라오스 독립파의 전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1949년 프랑스는 라오스를 독립시켰지만 국방, 외교, 재정권을 프랑스가 가졌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독립이었다. 하지만 곧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익의 지도자는 라오스 왕국의 총리가 된 수바나 푸마였고 좌익의 지도자는 수파누봉이었다. 1950년 라오스의 공산세력이 뭉쳐서 파테트 라오가 탄생했다. 내전은 계속 심해졌고 결국 1954년에 스위스제네바에서 라오스의 왕실 유지, 파테트 라오가 참여하는 정부 수립을 골자로 하여 평화 조약이 맺어졌지만 중립은 실패하였고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격화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파테트 라오의 공격이 계속 심해져 라오스 정부는 계속 밀리게 된다. 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졌으나 1975년 남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망하고 라오스 국왕과 수바나 푸마가 물러나면서 좌익 성향의 정부가 수립된다. 파테트 라오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라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30년 동안에 걸친 라오스 내전은 완전히 종식되었고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이웃 나라 베트남에서 베트남전쟁이 일어나 라오스도 전쟁상황이 되었다. 베트남 북부 월맹군은 전쟁 물자를 라오스를 통과하는 이른바 '호찌민 통로'를 통해 전선에 수송하였다. 미군은 라오스내 소수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내전을 부추기면서 호찌민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비밀리에 라오스 전 국토를 폭격하였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50만 회의 폭격이 이뤄졌고, 2백만t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어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미국은 베트남전 종전시까지 폭격과 라오스 내전 개입을 부인해서 '비밀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까지도 폭격으로 인한 불발탄에 끊임없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라오스의 공산주의 체제는 실패하여 경제는 악화되었다. 게다가 타이와 미국의 경제 봉쇄로 라오스 경제는 파탄되었다. 1990년대에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 몰락으로 인해서 라오스도 시장경제를 허용하였다. 21세기들어 라오스 정부는 계속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아직까지 공산주의는 유지되고 있다.

 

이 나라는 인도차이나 반도 내륙부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 중 유일하게 바다가 면한 부분이 없다. 지형은 중국에서 남하하는 안남산맥이 국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므로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야는 메콩강 및 그 지류에 연해서 약간 펼쳐져 있을 뿐이다. 기후는 대다수 지역이 열대 몬순 기후이나 내륙 지방이므로 하계와 동계의 기온차가 크다. 사반나켓 등 남부 지역은 열대 몬순 기후이며(평균 25도) 북부의 루앙프라방 지역은 온대 동계 건조 기후이다. 그리고 중국과 인접한 산악 도시 무옹싱 지역은 겨울에도 이따금 서리도 내린다(1월 평균기온 10도). 5월부터 10월까지가 남서몬순이 부는 우기로, 약 2,000㎜의 강우가 있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북동몬순이 부는 건조기이다.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이다. 현재 라오스의 정당은 라오인민혁명당 하나뿐이다. 국가 원수는 5년 임기로 선거로 뽑히는 국가 주석이며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가 주석이 임명하는 국무총리가 있다.

옛날에는 정부의 정책을 폴리트뷰로(9명)와 당 중앙 위원회(49명)에서 결정했다. 1991년 라오스는 헌법을 바꾸어 국회의원(85명, 임기는 5년)을 비밀 선거로 뽑도록 개정했다. 라오스 국회는 1997년 99석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모든 새로운 입법안을 가결하였다. 가장 최근의 선거는 2002년 2월에 실시되었는데 이 때 의석 수는 109명으로 늘어났다.

 

라오스의 행정 구역

 

수도비엔티안이다.

 

라오스 국민의 생활은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공업은 미발달 상태에 있다. 농업은 수도작(水稻作)이 중심이지만 생산성이 낮아 국민의 주식인 쌀의 공급이 부족한 상태이다. 티크의 임업자원이 있으나 아직 충분히 개발되고 있지 않다.[5] 라오스는 베트남처럼 쌀을 수출한다. 1975년부터 공산주의 통제경제를 지켜오다가 1990년에 외국인 투자법을 재정하여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나라 주민의 대부분은 라오족이며 소수민족이 거주한다. 비록 인구는 적지만, 라오스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오스 특유의 고립성과 병존하는 이러한 다양성은 라오스가 문화·정치적으로 통합되는 데 심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역사적으로 이 나라는 지배족인 라오족에 의해 항상 통치되어 왔다. 그들의 통치는 최근까지도 소수민족의 생각이나 활동보다는 라오족 엘리트 집단의 생각이나 열망을 반영해 왔다.

그러나 라오스 정부는 라오스 국적을 가지는 라오스인을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으로는 소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라오스 정부의 지배하에 라오스인은 사는 지역의 고도에 따라 저지 라오족, 구릉 라오족, 고지 라오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나라 언어는 라오어프랑스어공용어이다. 그 외에도 영어, 베트남어, 태국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유일하게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는 라오스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 소속에 있다.

영어로 된 의사소통은 제한적이다. 베트남어는 일부 베트남에서 건너온 베트남인 자손들만 사용한다. 태국어는 라오어와 매우 흡사하고 라오스 내 텔레비전 방송 채널이 대부분이 태국방송이라 라오스에서 태국어를 사용해도 별 문제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라오스는 그리스어로 '백성'이라는 뜻이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승 불교가 라오스 문화의 핵심이다. 1975년 공산화 이후 불교는 그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1991년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그 세를 회복하였다. 라오스 국민의 67%가 소승 불교를 믿는다. 각 마을마다 사찰이 있으며 이 사찰은 종교행사뿐 아니라 주민들의 교육도 담당한다. 라오스는 공기가 매우 맑아 산림욕을 즐기기에 충분한 곳이다.

 

남방상좌부 불교가 60%, 애니미즘이나 그 외의 종교가 40%이지만, 불교와 애니미즘이 혼합되어서 믿는 경우도 있다. 그 외 라오스 남부에서는 기독교도 소수 믿고 있으며 무슬림도 소수 존재한다. 공산주의 정권의 집권 이후 종교의 자유를 탄압했지만, 1991년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이후 남방상좌부 불교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2003년 미국과의 협정 이후 현지 교회의 예배가 자유로워지는 등, 조금씩 완화되고 있다.

 

1974년 대한민국(남한)과 수교하였으나 1975년 라오스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단교하다가 1995년에 재수교하였다. 북한과는 1975년에 수교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선수 및 임원단을 파견하였다.

 

라오스의 역사는 13세기에 중국 남부에서 살던 타이계 민족의 하나인 라오족이 지금의 라오스 영토로 이주해 온 것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메콩 강 유역에서 살았으며, 특히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참빠삭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관계는 1353년에 크메르 왕국의 지원을 받고 라오스의 메콩 강 유역에 란상 왕국이 등장하였다. 란상 왕국의 지도자였던 파눔 왕은 크메르 왕국이 약해지자 독립을 선언하였고, 불교 국가가 되었다.

 

타이의 딱신 대왕은 1768년 방콕 건너편의 대방콕 일부에 속하는 톤부리를 도읍지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라오스·캄보디아까지 세력을 넓혔다.

 

라오스 정부포털  /  주라오스 대한민국 대사관  /  주대한민국 라오스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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