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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과 심사정

이충길민화

by 디자이너-이충길 2019. 6. 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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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과 심사정

1700년경 이후인 조선 후기는 서인, 그 중에서도 송시열(宋時烈, 1607년 ~ 1689년)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벌열(閥閱,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음)을 형성했던 시기다.
이들로부터 정권 참여를 배제 당한 유학자들이 지방에서원을 세우면서, 현실을 개혁하려는 실학과 주자의 설에 반대하는 양명학(陽明學, 주자의 성리학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이 주창한 학문)을 따르는 등 자유로운 사상도 싹트게 되었다.
자주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을 숭상하는 실학 사상은 무엇보다 조선의 현실에 관심을 가진 민족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겸재 정선(鄭敾, 정나라 정, 기울 선, 1676년 ~ 1759년)은 숙종부터 경종, 영조 연간까지 활동했던 화가로 18세기 전반 문예부흥기의 정점에 있다.
정선은 조선 후기,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창흡(金昌翕, 창성할 창, 합할 흡, 1653년 ~ 1722년)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실학의 발달과 자주적인 학문의 분위기에서‘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참 진)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룬 화가이다.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지본수묵담채, 130.6x94.1cm, 국보 217호, 삼성미술관 리움

정선이 59세에 완성한 ‘금강전도(金剛全圖, 굳셀 강)는 세로 길이 130c센티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완숙기에 접어든 화가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 화면에 집약시킨 구도에, 수직의 첨봉과 나무가 우거진 토산이 대비된 산수 표현은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사실의 재현이면서도 작가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곳곳에 청묵(靑墨)을 사용해서 푸르른 자연의 경쾌함을 표현했고,푸르게 선염한 바탕 위에 붓을 가로로 뉘어 짧은 필선으로 무수한 수목을 그려냈다.
정선과 동시대를 살았던 문인들 중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던 사천 이병연(李秉淵, 잡을병, 못 연, 1671년 ~ 1751년)의 시는 정선의 그림을 완성시키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병연은 김창흡의 문하에서 정선과 인연을 맺었는데, 1712년 정선이 2차 금강산행에서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큰산 악, 문서 첩)’을 남겼는데, 이 화첩은 전하지 않지만 김창흡과 이병연이 쓴 제화시(題畵詩, 화폭의 여백에 그림과 관계된 내용을 담은 시)는 그들의 문집 속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감상하는데 이병연의 시가 없었다면 결코 참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정선은 이병연과 평생 절친한 벗으로 지내며 조선 회화사상 시인과 화가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을 보여주었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들 교)’은 둘 사이에 오간 시화가 담겨 있는 귀중한 화첩이다.
정선 ‘경고명승첩’ 중 광나루, 1740년 ~ 1741년, 20.1x31.5cm, 간송미술관

그 중 ‘시화환상간도(詩畵換相看圖)에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묘사되어 있는데, 화면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병연이고 그가 마주한 사람이 정선이다.
그림 속 두 사람이 풍류를 즐기는 것처럼 18세기에는 산수를 유람하고 산림에 은거하는 풍조가 유행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전국을 방랑하는 문인묵객이 늘어났다.

정선 ‘경교명승첩’ 중 시화환상간도, 1740년 ! 1741년,견본담채, 26.4X29.5츠

이병연 외에도 정선과 교류한 이들은 조영석, 이하곤, 강세황 등이 있었으며, 모두 정선의 그림에 부치는 빼어난 시를 남겨 18세기 전반 문예부흥기의 멋과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비갤 제, 비 내린 뒤의 인왕산의 분위기)는 18세기 화단을 지배하던 남종문인화풍의 바탕에 조선에 실재하는 자연을 독자적인 양식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지본수묵, 79.2x138.2cm,국보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1751년, 영조 27년에 그린 이 그림은 비 온 뒤에 수분을 머금어 더 짙어진 바위의 질감과 괴량감(塊量感, 덩어리 괴, 헤아릴 량)을 짙은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정선은 동시기 활동했던 심사정(沈師正, 잠길 침, 스승 사)과 쌍벽을 이루었고, 겸재(謙齋, 겸손할 겸, 재계할 재) 정선과 현재(玄齋, 검을 현) 심사정의 호를 따서 ‘겸현(謙玄)’이라 불렀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신위(申緯, 거듭 신, 씨 위, 1769년 ~ 1845년)는 심사정은 옛 것도 잘 모방했지만 스스로 창작하는 것이 부족했고, 정선은 스스로 창작하고 옛 것도 잘 모방하여 그 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둘의 우열을 평했으니 오늘날의 평가도 이와 같다.

정선이 70대의 나이에 남긴 또 다른 명작이 ‘박연폭포(朴淵瀑布, 폭포 폭)’다.

정선 ‘박연폭포’, 지본수묵, 119.1x52cm, 서울, 개인 소장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그린 이 그림은 ‘인왕제색도’를 연상시킬 만큼 진한 먹으로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절벽을 그리고 그 사이로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대비시켜 생동감 있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중국 사람들조차 정선의 그림을 보고 “비로소 겸재의 그림이 신의 경지에 이른 줄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다투어 샀다고 하니 그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병연이 정선의 그림을 중국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팔게 해서 많은 책을 사오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년 ~ 1769년)은 정선,조영석과 함께 조선 3재(齋, 재계할 재)의 한 사람으로 칭해진다. 정선과 동시대 사람이며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오늘날의 평가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정선이 자주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수립한 데 반해 심사정은 중국 대가들의 화풍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심사정 ‘방심주산수도(倣沈周山水圖, 본뜰 방, 잠길 침/성씨 심, 두루 주)’, 1758년, 지본담채, 129x62.1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은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지만 두 사람이 자연을 보는 관점은 달랐다.
숙종부터 영조 연간에 걸쳐, 권문세가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몰락양반으로 추락한 집안사는 심사정이 일찍이 관직에 대한 꿈을 접게 했다.
심사정은 1748년에 장경주, 김희성, 장득만, 윤덕희와 함께 어진 모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 달 만에 심사정이 대역죄인의 후손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기 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지만 김광수, 김광국, 이병연, 강세황등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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